빈 체제에 따라 샤를 10세가 의회를 해산했다고 하잖아요그럼 나폴레옹 때도 의회가 있었던 건가요?나폴레옹 때는 제정인데도 의회가 있는거에요,,?

질문하신 내용은 역사적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빈 체제와 샤를 10세의 의회 해산 사건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또한,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도 형식적으로나마 의회 기구는 존재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샤를 10세의 의회 해산과 빈 체제

샤를 10세가 의회를 해산한 사건은 1830년 7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이는 빈 체제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 (1) 빈 체제 (Congress of Vienna System, 1815년):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절대 왕정 체제로 복귀하려는 보수적인 국제 질서였습니다. 주요 원칙은 정통주의(Legitimacy)와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이었습니다.

  • (2) 샤를 10세 (Charles X):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국왕입니다. 그는 빈 체제가 복원한 '정통 군주'였지만, 의회 해산은 그가 개인적으로 추구한 반동적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 (3) 사건 경위: 샤를 10세는 입헌 군주제를 부정하고 절대 왕정으로 회귀하려 했습니다. 의회가 이에 반발하자, 1830년 7월 26일 네 개의 칙령(Ordonnances de Juillet)을 발표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 자유를 탄압했습니다. 이 칙령이 파리 시민들의 봉기를 촉발하여 7월 혁명이 일어났고, 샤를 10세는 폐위되었습니다.

즉, 샤를 10세는 빈 체제의 수혜자였으나,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 빈 체제가 지향하던 질서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2. 나폴레옹 시대의 의회 (제정 기간 동안)

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나폴레옹 1세)로 통치하던 제1제정 기간(1804년~1814년)에도 형식적인 의회 기구는 존재했습니다.

  • (1)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나폴레옹은 집정정부 시기부터 이미 강력한 권력을 장악했으며,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에, 혁명의 명분인 '국민 주권'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 (2) 의회 기구의 존재: 나폴레옹은 호민원(Tribunat), 입법원(Corps législatif), 원로원(Sénat conservateur) 등 여러 개의 의회 기구를 두었습니다. 이는 입헌주의의 형식을 갖추기 위함이었습니다.

  • (3) 실질적인 권력: 그러나 이 의회들은 나폴레옹의 통치를 보좌하는 역할에 그쳤으며, 실질적인 입법 권한이나 견제 기능은 미약했습니다. 황제가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특히 호민원은 점차 권한이 축소되다가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나폴레옹은 독재자였지만, 혁명 프랑스라는 배경 때문에 완전히 의회를 없애지는 못하고 그 기능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